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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문인지 즐겁고 설렌 기억이 또렷이 난다. 유치원에 관한 분명하고도 강렬한 또 다른 기억 하나는 당시 대통령의 의젓한 유년 시절을 그린 만화책이었다. 그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럼에도 어른들이 항상 말하던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모범이 무엇인지 알게 된 일종의 사건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도 대통령의 그것과 같게만 한다면 나도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코흘리개가 아니었다. 의젓함이란 단어가 뇌리에 박혔다. 위로 형과 누나가 있었는데, 수시로 '국민교육헌장'을 외웠기에, 나도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암송하고 싶은 욕심에 따라 외웠던 기억도 난다. 덕분에 학교에 입학하고 나선 선생님께 손바닥을 맞을 일은 없었다.
그해 여름이 오기 전, 동네 형들을 쫓아 나무를 타다가 떨어져 팔이 부러졌고, 아픈 것보다 깁스한 팔이 끔찍이도 간지러워 인생의 고통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부서진 뼛조각을, 살을 째서 맞추느라 지금도 팔꿈치엔 긴 흉터 자국이 남아 있다. 어머니께선 나를 혼내진 않으셨는데, 깁스한 팔을 긁어주시며 눈가가 글썽거릴 정도로 안쓰러워하시던 모습이 한 장의 사진처럼 각인돼 있다. 그러다가 여름이 한창이던 어느 날, 갑자기 어른들은 무슨 일이 났는지 모두가 울고 계셨다. 영부인이 총을 맞고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그때 유일하게 밤 시간대에 TV 시청을 허락받아 아버지랑 같이 보던 '수사반장'도 볼 수 없었다. 전국은 애도의 물결이었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한동안 무기력과도 같은 슬픔 감정을 학습했다. 내 팔의 깁스와 간지러움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또 다른 불행이 다가왔다. 그해 여름이 가기 전, 할아버지는 위암 판정으로 병원에 입원하셨고, 해를 넘기지 못하고 겨울에 접어들 때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러곤 하루 만에 임종하셨다. 잠시 의식이 돌아온 할아버지는 내 손을 잡아 주셨고, 얼마 있다가 다시 주무시나 했는데 갑자기 어른들이 소리 내어 우셨다. 뺨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던 집안 어른들의 모습은 이미 지난여름에 학습된 풍경이었다. 이로써 세는 나이로 일곱 살, 나는 두 번의 죽음을 목도했다.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른들께 물어보았었는데, 아버지는 '죽는다는 것은, 살아서 다시는 만날 수도, 볼 수도 없다는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너무도 또렷이 기억에 새겨진 문장이었고, 이후 9살, 국민학교 2학년이 된 내 생각을 지배하게 된 단어가 죽음이었다. 만으로 7살, 아직 오이디푸스 시기를 떨치지 못한 내겐, '만약 엄마가 죽으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엄마도 할아버지처럼 땅에 묻힐 텐데', 온통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었다. 내가 맞이한 세 번째 죽음은 1979년 10월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대통령이 총을 맞고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나라가 집단 초상집이 된 듯 소리 내어 울었고 물론 나도 울었다. 초등학교 5학년의 고학년, 곧 6학년이 될 나이였기에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울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울음은 죽음보다 무서운 어떤 두려움이었다. 나라가 망할 것 같은 공포였다. 국부가 없는 나라를 당시 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가끔 약주를 드시고 들어와 독재의 시대라고 한탄하시던 아버지도 그날만큼은 눈물을 흘리셨던 것을 정확히 기억한다. 여기서 잠깐 아버지를 소개하면, 아버지는 1931년생으로 6·25 사변이 발발하자 국군으로 참전한 분으로서 국가유공자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셨지만, 교직에 있다가 낙향한 지식인으로 평소 독재에 대해선 공공연히 반대의 뜻을 분명히 밝히셨다. 그때마다 할머니께선 말이 이웃에 새 나갈까 봐 노심초사하셨다. 그런데 그런 분이 정작 대통령의 유고엔 눈물을 감추지 않으셨다. 이로써 유년 시절에 피부로 느끼고 경험했던 누군가의 죽음은 공교롭게도 한 집안의 가부장과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한 나라의 국모와 국부의 죽음이었다.
한 개인사와는 괴리된 듯 보이지만, 그러나 절대적으로 별개일 수 없는 역사라는 또 다른 1974년은, 그해 네 번의 '긴급조치' 발동으로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헌법상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시켰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일체의 언론 활동을 국가가 통제하고 간섭했던 명백한 독재 체제로 기억한다. 산업화의 기초를 닦은 공은 공대로 기억해야 하겠다. 그러나 동시에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요한 또 다른 한 축인 민주화를 열망한 시민들과 지식인 그리고 기자들의 노력 또한 기억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들 사이에 발생한 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경제적 풍요를 이뤘지만 여전히 독재 체제를 상상하기 싫다. 또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만으로 사회가 혼란스럽고 먹고살기 힘든 경제적으로 낙후된 삶 또한 지양한다.
그간 우리는 후자의 테제와 전자의 안티테제 사이에서 현재 문화 강국 대한민국이라는 위상으로서 진테제를 가꾸어냈다. 그것은 분명 한쪽의 논리에 기운 확증편향의 방에 갇혀 짖어대는 하울링의 공허한 메아리와는 궤가 다른, 대한민국 국민이 희생을 치러가며, 변증법적으로 이뤄낸 고귀한 역사적인 가치이다. 그 하나의 사례로 기자의 존재 이유를 자기 증명했던, 주지의 팩트는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다. 1974년 12월, 정권 차원의 언론 탄압으로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기로 했던 회사들이 무더기로 해약했고, 그 결과 광고를 채우지 못한 부분을 저항의 목소리를 담아 백지로 내보냈던 기자들의 투쟁 과정을 말함이다.
그 원인이 된 당시 언론의 현실과 저항이 어떠했는지, 지금 우리가 극장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마저 기적적이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그런데 '기자의 존재 이유에 대한 자기반성'은 고사하고, 기성 매체의 기자(들)로 대표되는 많은 언론인(들)은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무엇이 중한지 모르는 척함으로써 스스로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꼴이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미디어스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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