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웅희 교수 | 0 | | 이웅희 한양대 경영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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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미국에서 최초의 가정용 냉장고가 나왔을 때 그 가격을 현재 한화로 환산하면 4000만원 정도였다. 지금 한국에서 60만원 정도면 가정용 냉장고를 살수 있다. 4000만원의 1~2% 수준이다. 90년대 말 미국에서 최초의 42인치 평면 TV 가격도 지금 한화로 4000만원대였다. 현재 한국에서 40인치 평면TV의 보급형 가격은 20만원대로, 4000만원의 0.5%밖에 안 된다. 이밖에 전자레인지, 세탁기, PC, 노트북, 자동차 등 초기에 고가로 출시되었다가 나중에 가격이 크게 떨어진 첨단 혁신제품들의 사례는 무수히 많다. 이 드라마틱한 성취에는 수많은 기업가와 엔지니어의 끊임없는 도전과 혁신이 있었다. 그런데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는 한 계층이 있다. 바로 고가에 이 제품들을 샀던 초기구매자(early adopter)들이다.
고가품 소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우리나라는 물론 어느 나라에나 공통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우리가 지금 많은 제품들을 비교적 싸게 살 수 있는 이유는 초기에 고가의 첨단제품을 구매했던 얼리 어답터의 덕이기도 하다. 이들이 없었다면 애당초 시장형성이 되지 않았고, 그 후에 일어날 기술혁신과 경제적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의 적극적인 구매 덕분에 최초 시장이 형성되었고, 시장기회를 파악한 경쟁자들이 진입하여 치열한 경쟁을 통해 공정혁신과 성능혁신이 일어나며 가격이 떨어졌다. 가격이 떨어지자 중산층 시장이 열리고, 규모의 경제가 일어나며 가격이 더 떨어진다. 이 시장과정(market process)을 통해, 차별적 고가품이 일상재화(commoditization)되어, 과거 소수의 부유층이 쓰던 냉장고, TV, 스마트폰 등을 이제는 저소득층들도 쓸 수 있는 신세계가 열린 것이다.
따라서 초기 혁신제품 얼리 어답터의 고가지출은,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차후의 기술혁신을 가능케 했으며, 훗날 이를 구매하는 중산층 및 저소득층의 가격부담을 덜어주는데 큰 몫을 했다. 이 위대한 '사회적 공헌'의 과정에 놀랄만한 비밀은 없다. 그저 평범한 시장경제논리에 따라 모든 참여자들은 자신의 이익에 충실했을 뿐이다.
한편 어떤 기업은 똑 같은 제품을 동시에 고가와 저가의 가격으로 판매하는 가격차별화(price discrimination)를 통해 위처럼 저소득층의 가격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 예를 들어 많은 제약업체들은 똑같은 약품에 대해 선진국엔 높은 가격을, 개도국 저소득층에는 낮은 가격을 받아, 이들도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한다. 냉장고, 평면TV의 경우, 초기구매자와 후속구매자가 시간적으로 분리되는 반면, 가격차별화의 경우 두 소비집단의 소비가 동시적으로 일어난다는 차이가 있을 뿐, 부유한 계층의 지출이 다른 저소득 계층에게 혜택을 준다는 점에선 비슷하다.
또한 기업이 시장세분화를 해 다양한 모델을 제공하는 경우에도 유사한 효과를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대형 자동차회사들은 원가를 반영하여 고급모델은 비싼 가격으로, 저가모델은 싼 가격으로 출시한다. 그런데 이들은 기업전략의 목적으로 고가모델을 더 비싸게, 저가모델은 더 싸게 받아 저소득층에 더 혜택을 줄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고가모델과 저가모델을 같이 생산하는 현대차, VW, 토요타 같은 대형 생산업체는 고급모델만 생산하는 페라리 같은 기업보다 저소득계층에게 혜택을 줄 수도 있다. 마치 '사회적 기업'과 비슷한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모든 고가품 소비에 이런 사회적 지원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고 보석, 명품백 등 베블렌재(Veblen goods)는 예외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단순히 자원배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부의 재분배와 유사한 과정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회적 혜택의 규모를 파악하기는 쉽지는 않으나, 어림짐작은 해볼 수 있다. 얼리 어답터의 고가 혁신제품 구매가 국내 일반 가구에 연간 8만원 정도의 후생을 준다 가정하면, 그 사회적 총 후생효과는 국내 100대 기업의 연간 사회공헌 지출액인 약 1조 8000억원과 맞먹는다.
시장에는 탐욕과 약육강식만 존재한다는 통념이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강력한 울림을 가진 곳이 한국사회다. 그러나 시장은 본시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가 함께 창출되는 장소다. 시장은 경제적 가치만 추구하기에, 사회적 가치는 별도로 추구해야 한다고 하는 주장은 경제활동이 본시 사회적 활동이라는 것을 간과한 오해다. 착한 일을 한다고 떠벌리지도 않으면서도, 조용히 사회적 후생마저 챙기는 자유 시장경제시스템의 색다른 면모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웅희 한양대 경영대 교수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